(료맛->랍콩 리네이밍)
혹시나 해서 찾아온 그곳은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려져있는 옷가지와 장식품들은 비릿한 향과 잘 어울려 마치 배경처럼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음식물이 잔뜩 담긴 접시와 와인 병은 여기저기 파편이 되어 돌아다니며 깨진 와인에서 흐른 끈적한 것이 시큼하고도 단내를 풍겨 초파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덕분에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깔끔함의 대명사였던 그 집은 더 이상 없었다.
아침이에요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성인이 되자마자 해금이라도 된 양 매일 밖으로 쏘다녔었다. 나도 어디서 노는 거로는 빠지지 않던 놈인데, 나보고 왜 외출을 하지 않는 거냐며 타박을 줄 정도로 쇼핑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성격이 외향적이라고 보기엔 힘들다는 모순이 있었으나 조용조용 자기 할 말 다 하고 살던 녀석이었다. 그래. 갑작스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기 전까진 그랬다.
녀석의 말과 주변 소문을 듣기론 처음엔 잘 되어가는 듯싶었다. 평소 남자답다고 소문나있는 녀석이 그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며 나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는 것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었고, 덕분에 내가 녀석의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그럴 때면 왜인지 모를 아쉬움과 쿡쿡 찔러대는 가슴 한구석에 쓴 맛이 입 안 가득 도는 것 같았지만,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장난을 치고 너 혼자 커플이냐며 면박도 주곤 했다. 놀러다니기 좋아했던 녀석이었지만 반대로 은근히 쑥스러움 많은 그 입에서 요즘 핑크빛이라는 말까지 나왔었으니까. 한편으로는 녀석의 그 기뻐하는 모습이 참 귀엽고 대견했다.
그렇게 몇 달 뒤였나. 한바탕 크게 싸운 것인지 엉엉 울며 전화가 왔었다. 제 앞에서는 쪽팔린다며 눈물 한 방울도, 징징대는 소리 한 번도 없던 녀석이었기에 어떤 대응을 해 주어야 하는지 답이 안 나왔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저 가만히 그 울음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입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난 밤새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던 그 울음소리를 받아듣기만 했고, 그 소리가 귓가에 환청마냥 맴도는 기분에 나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결국 눈 밑까지 진하게 내려오는 다크서클을 매달았다.
지치지도 않고 울던 만큼 그 다툼은 꽤나 오래 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러다 헤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회라도 잡은 철없는 아이마냥 좋아하기도 했다. 아프지마. 매일 응원 문자를 보내고 술 상대라도 해주려 전화를 걸기도 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그저 괜찮다는 녀석의 힘없는 목소리와 웃음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강아지마냥 뽈뽈대고 나다니기 좋아하던 녀석이 전혀 나올 생각을 안했다. 집이 좋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봐. 내게 나가 놀으라는 핀잔을 준지 몇 달 밖에 안됐는데. 자신이 할 대사가 아닌데도 애써 웃는다는 목소리로 저런 말을 했다. 나오기 힘들면 내가 집으로 갈까. 내 말에 왜인지 모르게 흠칫 놀라더니 아니라며 또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 녀석은 전화 할 때 마다 웃었다. 웃고, 웃고, 괜찮은 듯이 또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 나는 삶은 계란 몇 개를 꾸역꾸역 한 번에 삼킨 것 마냥 속이 답답하고 매어져왔다.
야, 네가 자주 가는 옷가게에 신상 들어왔어. 안부 전화는 하루의 한 번 이었지만, 거의 매일 붙어있었던 나로서는 그 한 번의 통화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전화를 걸었고, 전화할 거리가 떨어지자 별의 별 것을 찾아다니며 핑계 거리를 만들었다. 우와, 정말? 이쁜 거 많이 들어왔어? 구경 가고 싶다. 어떤 이야기던지 심심한 통화로밖엔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어서 그 짧은 순간이 좋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아. 나 그 사람이랑 화해했어. 이제 계속 집에만 있고 내 옆에만 있어준대. 다행이지.]
그 날도 어떤 핑계를 댈까 고민하던 도중이었다. 정말로 갑작스런 문자. 그리고 그만큼 위화감 있던 문자였다. 하지만 그 문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모든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간과하며 방심하듯이 나도 그랬다. 다시 한 번 더 놓친 자신이 싫었고 가슴 한 켠이 아파왔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더 보내게 되어서,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어서, 이제 밖으로 나와 나를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런 헤이해진 생각만 하고서 계속해서 뒤척이던 밤잠을 그날따라 유난히, 꿈도 꾸지 않은 채 편하게 잤다. 어느 뻔한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식아. 나 잠이 안와.]
[식아. 심심해.]
[식아. 나는 잠도 못자고 있는데 그 사람은 잘 자고 있어. 얄밉게.]
[식아. 나 열 있나 봐.]
[식아. 그 사람이 계속 잠만 자.]
[식아. 너도 자는 거야?]
소름끼칠 정도의 문자였다. 식아. 식아. 식아. 앞이 온통 녀석이 부르던 내 이름으로 도배되어 온 문자에 갑작스레 손이 떨려 그대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놓쳤다. 심심 할 때면 자주 보던 스릴러 영화만치 뻔한 감정변화에 멍하니 사고회로가 멈춰버린 머리를 뒤흔들었다. 설마. 설마. 그 녀석이 그럴 리가 없다. 깨지 않는 그의 옆에서 엄지손톱만 물어뜯으며 그 사람을 깨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침 차렸으니까 어서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보라고.
튕겨져 나가듯 몸이 절로 움직여 부스스한 머리도 손대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 그래도 조만간 꼭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급하게 찾아가게 될 줄 몰랐다. 게다가 괜찮을 거란 생각과 설마하는 걱정에 급해진 몸이 이리저리 따로 놀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영화 독백의 ‘정신 차리고 보니’ 라는 말도 쓸 수 없을 만큼. 차릴 정신이 몽땅 빠져나가 하늘도 아닌 어디론가 흩어진 기분이었다. 차는 숨을 헉헉 내어 쉬며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고 그 난장판인 집을 보기 전까지 그런 상태였다.
그리고 뻔하게, 정말로 뻔하게. 난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흩어진 혼을 되찾을 만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식아. 왔어? 좋은 아침.”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양 볼에는 항상 저가 마르고 닳도록 찬양하던 보조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너, 그 옆에 그건 뭐야. 반대로 그런 녀석을 찬양하던 저의 입가는 모터라도 달아둔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니, 입가뿐만이 아니라 그냥 온 몸이 떨렸다. 같이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유리조각들과 옷가지. 철 지난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이 바닥에 말라비틀어져 있는, 산소와 만나 검붉어진 액체. 그리고 그 카펫위에 그를 재우듯 제 무릎에 뉘인 녀석은 꼭 모든 것이 끝난 뒤 온 잠잠함과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왔는데 집이 난장판이라서 미안해. 너 올 줄 알았으면 좀 씻고 있을걸. 나 오늘은 안 이뻐 보이겠다. 아니, 이 사람이 도통 일어나야 준비를 하지. 바닥에 말라 있는 것과 같은 액체가 튄 제 앞머리를 배배 꼬았다가, 다시 정리하듯 쓰다듬으며 그 식어버린 사람을 보며 다정하게 이야기 하는 모습에 머리가 어지럽다. 왜 그래 너, 왜 그래.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쥐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자리 잡고 버텨줄 힘이 어디론가 몽땅 빠져나갔다.
식아. 이른 시간에 오느라 고생했어. 너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거 진짜 오랜만이지? 배고프겠다. 아침 먹을래? 소름끼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가 가득 차 있지만 공허한 그 집안을 가득 채웠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상황이 믿겨지지가 않아. 다가오는 생일날의 몰래 카메라라도 당한 건가 싶을 정도로, 이 앞에 펼쳐져 나뒹구는 것들이 모두 나의 환상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녀석은 평소 같이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어느 악마라도 다녀가 헤집어 둔 것 같은 이 집안에서, 녀석은 천사 같은 모습으로 웃었다. 천사의 모습으로 그 사람의 귀에 달큰하게 속삭였다.
“형, 원식이 왔어요. 벌써 아침이에요. 일어나요.”
* * *
'999*'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츠이쿠] 늦잠 (0) | 2015.02.22 |
---|---|
[타츠이쿠] 에피소드 마이너스 (0) | 2015.02.20 |
[타츠이쿠] 집착 (fan vid) (0) | 2015.02.13 |
[이쿠타츠] 겨울 (0) | 2015.02.04 |
[이쿠타츠] 장마 (0) | 2015.02.01 |